[단편] 만리향

4. “부끄러워하거든요.” 유담은 별것 아니라는 듯 답했다.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부모님의 지시대로 혼자 병원에 방문한 날이었다. 다른 곳도 아닌 알파 클리닉에 혼자 와야만 했다는 사실은 여전히 못마땅했다. 그 덕분에 내 궁금증을 원형 그대로 유담의 앞에 끄집어낼 수 있었지만. 그러나 돌아온 답이 예상과 전혀 달랐기에, 나는 고작 5초 전에 건넨 질문이 ...

3. 전방에 과속방지턱이 있습니다. 네비게이션의 안내를 들은 어머니가 차의 속도를 줄였다. 나는 앞으로 기울어지는 몸을 꼿꼿하게 가누려 애썼다. 별 보람은 없었다. 과속방지턱을 넘는 동안 차체가 흔들리자 속이 울렁거렸다. 서둘러 뒷좌석의 창문을 내렸다. 신선한 공기를 마시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병원에 다녀온 날에는 언제나 속이 좋지 않았다. 성인 알파들...

2. 남자의 정체는 얼마 안 가 알 수 있었다. 페로몬 농도 검사 때문에 2주 만에 다시 찾은 병원은 여전히 낯설었다. 어디를 보든 덩치 큰 어른 알파들이 가득했다. 병원 직원들은 대부분 알파 아니면 베타 같았다. 간혹 마스크를 쓰고 지나가는, 오메가로 보이는 사람들도 눈에 띄긴 했지만 극소수였다. 접수를 하는 부모님의 옆을 떠나지 못한 채 나는 어깨를 움...

1. “좋아해.” 유담과 처음 만난 건 내가 열여섯 살 때였다. 그때 나는 한창 첫사랑 때문에 가슴앓이하고 있었다. 상대는 같은 반의 오메가 여자애였다. 좋아하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그 애는 내 앞에 앉고서도 자리를 바꾸지 않은 유일한 오메가였다. 방학을 일주일 앞둔 여름날, 나는 일생일대의 용기를 내기로 했다. 점심시간에 짝사랑 상대를 따로 불러내선 며...